[세상읽기] 나라를 팔았는데, 이주민이 먼저 도착했다

1823년, 포야이스의 첫인상

1823년 2월, 영국에서 떠난 온두라스 패킷호가 중앙아메리카 블랙리버 해안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포야이스’라는 곳에 정착할 사람들이었다. 짐과 물자를 내리고, 땅을 일구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들이 영국에서 접한 포야이스에는 토지 안내서가 있었고, 지폐가 있었고, 국가의 이름으로 발행한 채권도 있었다. 통치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남미 독립전쟁에 참여한 장군이었다.

배에서 내려 보니 땅은 있었다. 먼저 와 있던 사람도 있었고 현지 주민도 있었다.

하지만 나라라고 믿고 찾아온 사람들을 받아들일 도시는 없었다.

안내서에 적힌 미래가 현재인 줄 알고 온 사람들 앞에, 아직 풀어야 할 일이 산더미인 정착지가 놓여 있었다. 포야이스 사기 사건의 핵심은 ‘지도에 땅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땅의 개발 가능성이 이미 운영 중인 나라의 모습으로 팔렸다는 것이다.

포야이스로 향하는 19세기 범선 두 척을 상상해 재현한 그림

1. 포야이스 이주민은 귀족이 되려고 떠났을까?

먼저 이주민들이 왜 배를 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영국에는 왕과 세습 작위를 가진 귀족이 있었고, 땅을 소유한 상류층과 사업가·상인·전문직의 중간층, 임금에 의존하는 농업 노동자와 수공업자 등이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법으로 정해진 신분에서 평생 한 발짝도 나올 수 없는 고정된 신분제였다고 설명하면 틀린다.

다만 재산과 토지가 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좌우한 사회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포야이스 이주가 시작된 1822년에는 아직 1832년의 선거법 개혁도 이뤄지기 전이었다. 그 개혁 뒤에도 재산 요건 때문에 대다수 노동자는 투표권을 얻지 못했다.

땅을 가진 사람과 남의 땅에서 일하는 사람 사이에는 소득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포야이스행 사람들도 한 부류가 아니었다. 농업 노동자와 목재 일을 할 사람뿐 아니라 여러 기술자와 가족들이 포함됐다. 땅을 사려는 사람, 일자리를 약속받고 가는 사람, 투자하는 사람의 형편을 모두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분 탈피’라는 감각은 이 이야기에서 빼놓기 어렵다. 법적 신분을 바꾸려 했다기보다, 고향에서의 위치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남의 땅에서 일하던 사람이 자기 땅의 소유자가 되고, 임금을 받던 사람이 새 정착지에서 자기 일을 꾸릴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그 기대가 각 이주민의 실제 속마음이었다고 일괄해서 말할 자료는 없다. 다만 토지 소유와 새 출발이라는 약속이 왜 강한 유혹이었는지는 당시 영국 사회의 재산·계층 구조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포야이스가 판 것은 에이커 단위로 나눈 땅만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여기서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2. 장군의 토지 문서가 ‘나라’가 되는 과정

포야이스를 알린 그레고어 맥그리거는 아무 이력도 없는 떠벌이가 아니었다. 실제 군 경력이 있었고, 남미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다. 이런 사실이 그의 다음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바탕이 됐다.

1820년, 맥그리거는 미스키투의 통치자 조지 프레더릭으로부터 블랙리버 일대의 토지를 개발하고 관리할 권한을 담은 문서를 받았다.

그런데 중요한 문장이 있었다. 미스키투 통치자의 주권까지 넘기는 문서는 아니었다.

현대식으로 비유하면, 어떤 지역의 개발을 맡을 권한과 그 지역을 독립국가로 소유할 권한을 같은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당시의 토지·주권 관계를 오늘의 사업 인허가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지만, 두 권한의 차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맥그리거는 이 땅을 포야이스라고 불렀고 자신을 ‘카시크’, 즉 통치자로 소개했다. 런던 사람들은 문서를 볼 수 있어도 블랙리버의 현실은 볼 수 없었다. 종이 위에서는 넓은 땅과 멋진 직함이 아주 잘 어울렸다.

실제로 살 집과 운영할 행정 조직이 있는지는, 종이의 여백에 남았다.

3. 건물보다 먼저 완공된 포야이스의 서류들

1820년대 런던 금융시장은 남미의 새 국가와 투자 기회에 관심이 컸다. 맥그리거의 포야이스도 그 시장에 등장했다.

1822년에는 포야이스 일대의 지형·기후·자원과 정착 전망을 소개하는 두꺼운 안내서가 나왔다. 토지증서가 팔렸고, ‘포야이스 은행’의 지폐가 인쇄됐다. 마침내 포야이스의 이름으로 액면 총액 20만 파운드의 채권 발행이 추진됐다.

19세기 유럽 도심의 포야이스 투자·이주 홍보 사무소를 상상해 재현한 그림

당시 안내서가 실제로 어떤 모습을 그렸는지는 1822년 포야이스 안내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야이스 명의의 화폐가 제작됐다는 사실도 영국박물관의 맥그리거 관련 소장 기록에 남아 있다.

책이 있으니 땅을 이미 조사한 듯했다. 지폐가 있으니 은행이 운영되는 듯했다. 채권이 거래되니 국가가 인정받은 듯했다. 어느 것 하나 현장의 완성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한데 모아 놓으니 제법 근사한 국가가 됐다.

포야이스 사기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제작한 포야이스 지폐 재현 이미지

실제 항구는 지어야 했지만, 인쇄된 항구는 책을 펴면 곧바로 나타났다.

20만 파운드는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이 숫자는 독자의 눈을 붙잡는다. 하지만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20만 파운드는 채권의 액면 발행 규모이지, 맥그리거 개인이 현금 20만 파운드를 받았다는 기록이 아니다.

액면 100파운드짜리 채권을 기준으로 최초 판매가는 80파운드였다. 이론상 액면 20만 파운드어치가 모두 그 값에 팔리고 대금이 전부 들어와도 현금 판매대금은 20만 파운드가 아니라 16만 파운드다.

그마저 한 번에 납입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액면 100파운드짜리 한 장을 기준으로 처음에는 15파운드를 내고, 나머지 65파운드를 나중에 두 차례, 35파운드와 30파운드로 나눠 낼 예정이었다. 액면 20만 파운드어치가 모두 청약되고 첫 납입금까지 들어왔다고 가정해도 당장 모이는 돈은 3만 파운드다. 실제 거래에는 중개 수수료, 선박과 물자 비용, 납입 지연과 채권 가격 하락까지 얽혔다. 그러니 액면 20만 파운드를 정착지 공사비 통장 잔액처럼 쓰면 안 된다. 채권의 가격과 분할 납입 구조는 당시 금융 자료를 분석한 역사 연구에도 정리돼 있다.

그렇다고 규모가 작았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적 화폐 가치를 비교하는 MeasuringWorth의 영국 파운드 비교 도구를 기준으로 보면, 1822년의 20만 파운드는 2024년 물가 기준 약 2,460만 파운드로 비교할 수 있다. 2026년 9월 23일의 환율 종가인 1파운드 약 1,809원을 단순히 적용하면 약 445억 원이다.

다른 자를 대면 훨씬 커진다. 당시 평균 노동자의 소득과 비교한 상대적 규모는 2024년 약 2억 4,400만 파운드, 같은 환율로 약 4,413억 원에 해당한다.

첫 번째는 “비슷한 물건을 사려면 지금 얼마인가”, 두 번째는 “당시 사람들의 소득에 비춰 얼마나 큰돈인가”라는 서로 다른 질문의 답이다. ‘지금 가치 4,413억 원을 맥그리거가 챙겼다’는 말은 아니다. 귀족 한 사람의 재산과 정확히 같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 채권 발행이 얼마나 큰 규모의 계획이었는지 감을 잡기 위한 비교다.

4. 배가 도착했을 때, 현지 주민은 무엇을 했나

첫 이주선이 블랙리버에 닿았을 때 그곳에는 워런이라는 선행 정착자가 있었다. 배에는 정착지에서 일할 의사 제임스 더글러스도 타고 있었다.

현지의 카리브 주민들은 물자를 배에서 내리는 일을 도왔다. 카리브와 파야 주민들은 이주민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오두막을 짓는 데도 참여했다. 그 대가로 의사의 진료를 받거나 화약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과정은 미스키투 통치자와 블랙리버 정착을 연구한 논문에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 사실은 사건을 더 구체적으로 만든다. 이주민들이 “아무도 없는 정글에 내려져 의사도 약도 없이 즉시 죽어 갔다”고 쓰면 극적이지만, 기록과 맞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현지 주민들의 도움 덕분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도움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었는지가 곧 드러났다.

현지 주민들은 약속받은 보수와 실제 보수 사이의 차이에 불만을 가졌고, 1823년 3월 초 무렵 협력이 끊겼다. 식량과 집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손길이 빠지자 정착지는 빠르게 어려워졌다.

런던의 채권에는 액면가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블랙리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얼마를 줄지는 그렇게 매끄럽게 해결되지 않았다.

5. 두 번째 배가 왔고, ‘열병’이 돌았다

상황이 나빠질 무렵 케너슬리 캐슬호가 더 많은 이주민을 싣고 도착했다. 먹을 사람은 늘고 의료 물자는 부족해졌다. 정착지에서는 당시 기록이 **‘열병’**이라고 부른 질환이 퍼졌다.

여기에는 정확한 표현이 필요하다. 포야이스 사건을 소개하는 글에는 황열병, 말라리아, 이질이라는 병명이 흔히 나란히 나온다. 그러나 당시 기록의 ‘열병’을 오늘날의 검사 결과처럼 받아들여 세 질병이 모두 확진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연구자들은 당시 증상과 환경을 보고 말라리아나 이질 가능성을 언급한다. 황열병도 후대의 사건 서술에 등장하지만, 이 정착지의 환자마다 황열병이었다고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가 병의 차이를 알고 싶다면 다음 자료를 함께 볼 수 있다. 황열병과 말라리아는 감염된 모기를 통해 전파되지만 서로 다른 질병이다. 이질은 피가 섞인 설사 등을 일으키는 장 감염이다. 이 링크들은 질병 설명 자료이지, 1823년 포야이스 환자의 확진 기록은 아니다.

의사 더글러스는 환자들을 돌봤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의료 수단과 부족한 물자로는 번지는 병을 막지 못했다. 정착지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인 홀은 미스키투 통치자에게 도움을 구하러 갔다. 토지의 권한과 이주민들의 처우를 둘러싼 갈등도 깊어졌고, 조지 프레더릭은 결국 맥그리거에게 준 권한을 취소했다.

영국에서 판매된 포야이스의 서류는 여전히 존재했다. 현지에서 그 서류를 뒷받침할 권한과 생활 기반은 무너지고 있었다.

6. 포야이스 이주민 몇 명이 갔고, 몇 명이 살아 돌아왔나

널리 인용되는 집계는 첫 두 이주선의 승객 약 250명, 사망자 약 180명, 영국으로 돌아온 사람 50명 미만이다.

여기서 ‘귀환자 50명 미만’과 ‘생존자 50명 미만’은 전혀 다른 말이다. 구조 뒤 영국령 온두라스, 지금의 벨리즈에 남거나 다른 지역으로 간 생존자도 있었다.

또 사망자 모두가 블랙리버 해안에서 숨진 것도 아니다. 이주민 제임스 헤이스티가 남긴 1823년 항해·정착 기록에 따르면 정착지에서 숨진 사람도 있었지만, 벨리즈로 옮겨진 뒤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 배와 후속 이주민을 어디까지 집계에 넣느냐에 따라 총인원이 달라지므로, 250명과 180명은 확정된 한 장의 승객 명부가 아니라 널리 사용되는 대략적 수치로 읽어야 한다.

헤이스티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났다가 두 자녀를 잃었다. 그럼에도 귀국 후 일부 생존자와 함께 맥그리거보다 현장 책임자 홀과 대리인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남긴 진술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이렇다. 생존자들은 신문이 자기들 말을 잘못 전했다고 항의했고, 현장 책임자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정착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이 들은 일부 화려한 시설 이야기도 맥그리거에게 직접 들은 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사실관계를 모두 최종 판정해 주지는 않는다. 맥그리거를 믿고 싶어서 그랬는지, 현장에서 본 책임자의 행동 때문에 그랬는지, 각 사람의 마음속 이유까지 단정할 수도 없다. 기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그런 취지의 진술을 남겼다는 사실과, 참사를 겪은 생존자 사이에서도 책임을 보는 시선이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7. 영국에서는 떠났는데, 프랑스에서는 왜 못 떠났나

영국의 이주민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같은 사업을 벌이자 여권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영국 관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당시 영국에서 해외로 나가는 사람에게 여권 신청이 일반적인 의무는 아니었다. 여권 자체는 존재했지만, 오늘날처럼 모든 출국자가 반드시 발급받아 심사를 거치는 제도가 아니었다. 따라서 영국 이주선이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정부가 포야이스를 국가로 확인하거나 정착의 안전을 승인했다고 볼 수 없다. 영국 정부의 여권 역사 안내도 영국 여권의 역사와 법적 성격을 설명한다.

프랑스에서 맥그리거는 누벨 뇌스트리 회사와 포야이스 정착 사업을 추진했다. 회사는 르아브르항에 배를 준비하고 이주민을 모집했다. 이 회사의 활동은 프랑스 식민 투자 사업을 다룬 역사 연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번에는 여행 서류가 눈에 띄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포야이스로 가려는 약 30명은 먼저 여권을 받았다. 뒤이어 같은 목적지로 가겠다는 신청이 더 들어오자 당국이 의심을 품었다. 프랑스 당국이 처음부터 포야이스행 여권을 한 장도 내주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1820년대 프랑스 여권의 모습을 상상해 재현한 이미지

결국 회사의 배는 항구를 떠나지 못했다. 당국은 수사에 착수했고, 맥그리거도 체포됐다. 그는 구금된 뒤 1826년 재판에서 무죄 판단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배가 먼저 현장에 도착했다. 프랑스에서는 추가 여권 신청을 둘러싼 의심이 배의 출항보다 먼저 커졌다. 두 나라의 차이를 “영국은 속고 프랑스는 똑똑했다”로 끝낼 일은 아니다. 출항 과정에서 목적지를 다시 확인하게 된 계기가 달랐던 것이다.

에필로그 1. 현대의 독자라면 이렇게 묻지 않을까?

“이 정도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진짜 도시를 만들면 되지 않았나?”

사업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 발 더 나아갈 것이다.

“땅이 있고 투자자를 모았고 선박까지 띄웠다면, 단계별로 정착지를 조성하면서 운영할 수도 있지 않았나? 왜 안내서에 적은 모습과 현장 사이가 그렇게 벌어졌지?”

포야이스에는 실제 토지 허여와 정착 시도가 있었다. 그러니 이 질문은 터무니없지 않다. 그러나 채권의 액면 20만 파운드가 공사 계좌에 입금된 현금 20만 파운드는 아니었다. 처음 납입받는 돈은 일부였고, 할인 판매·수수료·운송 비용이 있었다. 뒤에 들어올 예정인 돈도 시장 상황에 따라 흔들렸다.

돈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현지 주민과의 노동·보수 관계, 의료와 식량 공급, 미스키투 통치자의 주권과 토지 허여가 함께 풀려야 했다. 결국 토지 허여는 취소됐다.

맥그리거가 처음부터 도시를 만들 마음이 전혀 없었는지, 계획을 과장했는지, 실패가 예상된 뒤에도 어느 정도까지 위험을 알렸는지는 역사적 해석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의도를 단정하지 않아도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차이는 분명하다.

투자 설명서에 그린 완성된 생활과 실제 이주민이 내려야 했던 정착지는 같지 않았다.

에필로그 2. 사람들은 왜 끝까지 믿었을까?

한 사람은 장군의 경력을 믿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두꺼운 안내서를 믿었을 수 있다. 누군가는 토지증서와 채권을, 누군가는 먼저 떠나는 이웃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이곳을 떠나면 내 땅을 갖고 지금의 처지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피해자의 결점으로 돌릴 수는 없다. 더 나은 삶을 찾는 일과, 그 삶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업을 검증하는 일은 별개다.

포야이스 사건이 200년이 지나도 흥미로운 이유는 황당한 지폐 때문만이 아니다. 이 사건에서는 각각 진짜인 것들이 모여, 아직 진짜가 아닌 하나를 믿게 만들었다.

땅은 있었다. 문서도 있었다. 지폐는 실제로 인쇄됐다. 배도 출항했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도, 이주민이 도착하는 날 그곳에 살 수 있는 나라가 준비돼 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다음 글 예고|같은 1823년, 조선은 어땠을까?

그해 조선의 왕은 순조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조정에서는 안동 김씨 가문이 세력을 넓혔고, 1823년에는 김조순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이주민들이 포야이스로 떠날 때, 조선의 많은 농민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거나 세금과 군역을 감당하며 살았다. 양반·상민·노비를 가르는 신분 질서도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태어난 신분이 언제나 그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돈을 모아 땅을 사거나 신분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살림이 기울어 몰락하는 양반도 있었다. 1801년에는 국가 소유 공노비가 해방됐지만 사노비 제도는 계속됐다.

포야이스행 이주민이 기대한 ‘새 땅에서의 다른 삶’과 조선 사람의 사정은 같지 않다. 그래도 누가 땅을 가질 수 있고, 그 땅에서 일하는 사람은 무엇을 얻는가라는 질문은 두 사회를 함께 읽게 만든다. 다음 글에서는 1823년 조선의 일상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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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야이스 이야기를 읽고 나면 결국 “그 땅에서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오늘의 토지를 살펴볼 때 확인할 사항은 단독주택 건축 토지 분석 7단계에서 따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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