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조선시대 생활과 포야이스행 이주민들과의 상황은?
1823년, 포야이스행 이주민들이 중앙아메리카에 도착했다. 토지를 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약속을 믿고 대서양을 건넌 사람들이었다. 같은 해 조선시대 생활은 어땠을까? 평민은 어떤 일을 해서 재산을 모았을까?
왕의 이름뿐 아니라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재산을 잃고, 가족의 다음 끼니를 마련하던 방법을 살펴보면 그 시대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1. 조선의 인구와 2026년의 인구
1823년은 순조 23년이었다. 왕비의 아버지 김조순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의 영향력이 커져 있던 세도정치의 시기다.
당시 정부의 호구 집계를 정리한 역사 인구통계에는 인구 647만 570명, 가구 153만 4,238호로 나온다.
이것은 호적에 등록된 숫자다. 영유아 등 누락 인구가 있었고, 세금과 군역 부담을 피하려는 움직임도 영향을 미쳤다. 실제 조선 인구를 빠짐없이 센 결과로 읽기는 어렵다. 또 지금의 북한 지역까지 포함한다.
반면 2026년 9월 말 대한민국의 주민등록 인구는 5,108만 2,431명, 세대는 2,451만 3,716세대다. 외국인은 제외한 통계이며, 현재 지역을 일곱 권역으로 묶으면 다음과 같다.
| 현재의 지역으로 묶기 | 인구 | 주민등록 세대 |
|---|---|---|
| 서울 | 9,279,861명 | 4,524,905세대 |
| 경기도권·인천 | 16,845,514명 | 7,611,791세대 |
| 충청도권·대전·세종 | 5,575,207명 | 2,756,096세대 |
| 강원도 | 1,506,701명 | 776,594세대 |
| 경상도권·부산·대구·울산 | 12,342,148명 | 6,072,740세대 |
| 전라도권·광주 | 4,870,627명 | 2,453,703세대 |
| 제주도 | 662,373명 | 317,887세대 |
| 합계 | 51,082,431명 | 24,513,716세대 |
위 표는 행정안전부의 시·도별 주민등록 통계를 권역별로 합산한 것이다.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
여기서 ‘세대’와 ‘가구’는 구분해야 한다. 주민등록 세대는 행정상 등록 단위이고, 가구는 생계를 함께하는 생활 단위를 중심으로 집계한다. 2026년 7월 발표된 최신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총가구는 약 2,325만 가구였다. 이 가구 수의 기준일은 2025년 11월 1일이다.
1823년의 인구를 현재의 일곱 권역으로 나누는 작업은 별개다. 한성부는 지금의 서울과 경계가 다르고, 옛 경기도·강원도에는 현재 북한 지역도 포함됐다. 제주도는 전라도 소속이었다. 현재 확인한 자료만으로는 1823년의 권역별 인구와 남한 지역 합계를 확정하기 어렵다.
2. 조선시대 생활과 돈벌이, 평민은 어떻게 땅을 샀을까?
평민도 토지를 소유하고 사고팔 수 있었다. 자기 논밭을 경작하는 자작농이 있었고, 재산을 모아 지주가 된 평민도 있었다. 토지 거래에는 양반뿐 아니라 평민과 노비도 참여했다.
첫째, 농업으로 벌었다.
모내기와 농업 기술의 발달로 경작 규모를 늘리거나, 면화·담배·채소 같은 상품작물을 팔아 수입을 얻었다. 소작농 중에서도 넓은 땅을 경작하며 재산을 모으는 사람이 나타났다. 오늘날에 빗대면 농업경영인이나 상품작물을 생산·판매하는 농가에 가깝다. 수확에서 소작료와 생산비를 제하고 남긴 몫이 저축의 바탕이었다.
둘째, 수공업으로 벌었다.
농기구와 그릇을 만들고, 베·모시·무명 같은 옷감을 생산해 팔았다. 자기 물건을 직접 판매하기도 했고, 상인에게 재료나 자금을 받아 주문품을 만들기도 했다. 오늘날의 제조업자·공방 운영자·가내 생산자, 주문받아 생산하는 업체에 빗댈 수 있다. 다만 기계와 공장보다 사람의 손과 작은 작업장이 생산의 중심이었다.
셋째, 장사와 운송으로 벌었다.
생산지에서 곡식·소금·어물을 사서 다른 지역에 팔거나, 배로 상품을 운반하며 수입을 얻었다. 오늘날의 도소매업·유통업·운수업과 기능이 닮았다. 생산지와 판매지의 가격 차이, 상품을 모으고 운반하는 능력이 수익과 연결됐다.
넷째, 품팔이로 벌었다.
농번기의 일손이나 건축·성곽 보수 같은 공사의 인부로 일하며 돈과 곡식을 받았다. 오늘날의 농업 일용근로자나 건설 현장 인부에 해당하는 역할이다. 일감과 품삯은 일정하지 않았고, 흉년으로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늘면 품삯이 내려가기도 했다.
이렇게 번 돈에서 생활비와 생산비를 제하고 남겨야 땅을 살 수 있었다. 장사하거나 품팔이했다고 누구나 토지를 마련한 것은 아니다.
토지를 살 때는 매매문기를 작성해 대상 토지와 대금 등을 남겼다. 조선 후기에는 관청의 공증을 받지 않고 당사자 사이에 작성한 ‘백문기’도 널리 쓰였다. 오늘날 매매계약서와 비교할 수 있는 거래 증빙이지만, 현대의 등기제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정약용은 19세기 초 호남의 농가 100호를 예로 들며 지주 약 5호, 자작농 25호, 남의 땅을 경작하는 농가 70여 호라고 설명했다. 전국의 정확한 비율은 아니지만, 땅을 소유하는 것과 빌려 경작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보여준다.
3. 군인의 쌀 9두는 오늘날 얼마나 될까?
소작농은 추수한 곡식에서 소작료를 냈다. 수확을 절반씩 나누거나 일정량을 내는 방식이 있었다.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 군역을 대신하는 군포, 빌린 곡식을 갚는 환곡 등의 부담도 있었다.
그렇다면 군대에 가면 월급을 받았을까?
급료를 받는 군인이 있었다. 훈련도감에는 상시 복무하는 급료병이 있었고, 어영청에는 지방에서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 근무하며 급료를 받는 군인이 있었다. 어영청의 급료제에는 근무 기간 월 쌀 9두를 지급하는 기준이 나온다.<어영청>
여기서 ‘두’를 오늘날의 말로 바로 바꾸면 양이 달라진다. 조선시대 표준 양기를 복원한 설명에서 1두는 약 5.726리터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9두는 약 51.5리터다.
쌀 1리터를 약 0.8kg으로 가정해 무게를 계산하면 약 41kg, 지금의 쌀 20kg 포대 두 개 정도다.

2026년 10월 9일 KAMIS 기준 쌀 소매가격은 20kg에 6만 2,902원이었다. 위의 용량·무게 가정으로 계산하면 쌀 자체의 현재 가격은 약 13만원이다.
이것은 당시의 표준 용량을 적용한 계산 예시다. 실제 지급에 쓰인 양기와 쌀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당시 군인의 한 달 노동가치가 오늘날 13만원이었다는 뜻도 아니다. 쌀과 다른 물건의 상대가격, 생활비와 부양 부담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한편 군인을 뒷받침하기 위해 군포를 내거나 장비·왕래 비용을 부담하고, 군인이 집을 비운 동안 농사를 돕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군역은 직접 근무와 이를 지원하는 재정 부담이 함께 있는 구조였다.
4. 재산은 무엇 때문에 잃었을까?
평민이 땅을 사는 길이 있었던 만큼, 이미 가진 땅과 재산을 잃는 길도 있었다.
흉년과 자연재해. 가뭄과 홍수로 수확을 잃으면 먹을 곡식과 다음 농사의 종자부터 부족해졌다. 농사로 벌어 빚을 갚으려던 계획이 무너지고, 생계비를 마련하려 토지를 처분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빚과 이자. 곡식과 돈을 빌린 뒤 상환하지 못하면 이자가 부담을 키웠다. 조선 후기의 고리대는 농민의 경제적 몰락과 연결된 문제였다.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려 낸 빚이 생산수단인 논밭을 잃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세금과 소작 부담. 수확이 줄어도 소작료와 여러 납부 부담을 감당해야 했다. 부당한 징수나 환곡 운영의 폐단이 더해지면, 농사를 지어도 남기는 몫이 줄었다.
질병과 가족의 생계 위기. 일할 사람이 병들거나 사망하면 수입을 잃고 부양 부담은 남았다. 아래에서 살펴볼 정복삼 가족의 사례에서는 흉년과 유랑, 아버지의 사망과 본인의 질병이 겹쳤다.
양반에게는 관직과 정치적 기반의 상실도 중요했다. 양반 인구가 늘어도 관직은 한정돼 있었고, 정치적 갈등에서 밀려 관직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늘었다. 정치적 위세를 잃는 것과 가산을 모두 잃는 것은 같지 않지만, 경제 기반까지 약해지면 농사나 장사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중대한 범죄에 연루되면 재산 몰수도 뒤따를 수 있었다.
5. 노비가 되는 과정과 실제 거래대금
노비는 직업명이 아니라 법적 신분이었다. 개인이나 집안에 소속되면 사노비, 왕실·관청 등에 소속되면 공노비였다.
출생과 세습
1731년에 확정된 노비종모법에 따라, 1823년 무렵에는 어머니의 신분이 중요한 기준이었다.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녀도 원칙적으로 노비가 되고 어머니의 소속을 따랐다. 아버지가 노비라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자녀가 양인이 되는 원칙이 적용됐다.
자신이나 가족을 파는 자매
흉년과 가난으로 자신이나 가족을 노비로 파는 **‘자매(自賣)’**도 있었다. 거래 상대와 대가를 정하고 자매문기를 작성했다.
1809년 흉년 뒤 경주로 흘러온 정복삼은 아내와 세 자녀를 양반가에 팔았다. 문서에 적힌 대금은 전문, 즉 동전으로 35냥이었다. 네 사람 전체의 거래대금이며, 앞으로 태어날 자녀까지 거래 대상에 포함하는 내용도 있었다.
35냥을 현재 돈으로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까?
우리역사넷의 쌀 구매력 비교 예시는 18세기 쌀 1섬의 평균값을 5냥, 그 양을 약 93kg으로 설명한다. 그 가정을 적용하면 35냥은 쌀 7섬, 약 651kg에 해당한다.
이를 2026년 10월 9일의 쌀 20kg 소매가격 6만 2,902원으로 계산하면 약 205만원이다.
따라서 당시 평균 쌀값을 대입해 오늘의 쌀 구매력으로 비교하면 약 200만원 규모 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다만 1809년 흉년 당시의 실제 쌀값은 이 평균값과 달랐을 수 있다. 이것은 비교 기준을 정한 계산이며, 35냥의 모든 구매력이나 사람의 가치를 환산한 결과는 아니다.
노비 가격은 시기와 나이·성별 등에 따라 달랐으므로, 이 가족의 자매 가격을 모든 노비의 시세로 사용할 수는 없다.
범죄와 가족의 연좌
범죄로 노비가 되는 경우에는 본인의 처벌과 가족의 연좌를 나눠 보아야 한다. 연좌는 죄를 지은 사람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책임을 묻는 제도였다.
반역 관련 죄목은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 죄목 | 당시의 의미 |
|---|---|
| 모반(謀反) | 왕조와 군주를 전복하고 국가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는 모의 |
| 모대역(謀大逆) | 종묘·왕릉·궁궐 등을 파괴하려는 모의 |
| 모반(謀叛) |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다른 나라를 따르려는 모의 |
두 ‘모반’은 발음이 같지만 한자가 다른 죄목이다. 중대한 반역에서는 실행 이전의 모의도 처벌 대상이 됐다.
반역 외에도 강도, 관청의 인장 위조, 중대한 강상범죄, 밤에 무리를 지어 살인한 범죄 등에는 처자까지 노비로 삼는 규정이 있었다. 강상범죄는 부모 살해처럼 당시의 가족·신분 질서를 중대하게 훼손했다고 본 범죄였다.
죄목과 가족관계·나이 등에 따라 사형·유배·노비 편입 등 처분이 달랐고, 시대별 법과 실제 적용에도 차이가 있었다. 노비로 처분된 사람은 관청 등에 배속됐으며, 공신 집안에 배속하는 규정도 있었다. 따라서 범죄로 노비가 되는 경로와 그 뒤 누구에게 소속됐는지는 따로 살펴봐야 한다.
죄인이 소유한 사노비를 국가가 몰수해 공노비로 편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노비인 사람은 매매·증여·상속으로 다른 집안에 넘어갈 수도 있었다.
6. 노비는 월급을 받았고, 도망하면 어떻게 살았을까?
주인집에서 사는 노비와 따로 사는 노비
노비에게 일정한 현금 월급을 보장하는 일반적인 고용제도는 없었다. 주인집에서 일하는 솔거노비는 주인이 공급하는 음식과 옷 등에 의지하면서 집안일과 농사에 동원됐다. 주인집에서 생활하고 생필품을 받았지만, 맡긴 일을 자유롭게 그만두는 임금근로자와는 처지가 달랐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살며 자기 생계를 꾸렸다. 주인의 땅이나 다른 사람의 땅을 경작하고 소작료를 내거나, 독자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신공을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 신공은 노비 신분에 따라 주인이나 소속 기관에 내는 부담이었다. 이들은 주인에게 월급을 받기보다 자신이 번 수입에서 부담을 낸 뒤 남은 몫으로 살았다.
도망한 뒤의 생활
도망 노비가 숨고 살아갈 수 있었던 곳에는 섬·광산·목장·상업도시·포구와 변경 지역 등이 있었다. 농사와 품팔이, 광산·수공업장의 고용노동, 장시의 장사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신분을 숨기거나 호적·족보를 위조해 양인으로 행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양반에게 몸을 의탁해 보호받기도 했다. 하지만 도망에 성공하는 것만으로 법적인 노비 신분이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주인은 문서와 가족관계를 근거로 소재를 추적하고 관청에 추쇄를 요청했다. 남아 있는 가족에게 압력을 가해 행방을 알아내기도 했다. 다만 일부 섬과 변경 지역에는 인구 확보 등을 위해 추노를 제한한 곳도 있어, 어디서나 같은 방식으로 붙잡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인의 소유권이 인정돼 붙잡히면 원래의 주인이나 소속에 돌려보내졌다. 다시 노동과 신공의 의무를 지게 됐고, 주인의 매질 등 사적 처벌에도 노출될 수 있었다. 주인에게 마음대로 살해할 권한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노비가 주인의 불법행위를 고발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해방될 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노비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일부는 농사 수입을 모으고 경작 규모를 늘렸으며, 상업활동이나 상속 등을 통해 재산을 확보했다. 부모에게 받은 토지와 자신이 사들인 토지를 가진 노비도 있었다.
그런 사람은 주인에게 대가를 지급하고 해방되는 **‘속량’**을 추진할 수 있었다. 재산을 마련한 뒤 주인과 대가를 협의하고, 속량 문서를 받아 관청의 확인과 신분 정리를 구하는 과정이었다.
1734년의 노준석은 주인이 조상 묘소 공사비를 필요로 할 때 은자 50냥을 지급하고 속량했다. 이후 관청에 그 사실의 공증을 요청했다. 여기서 은자 50냥은 앞의 동전 35냥과 화폐 기준이 달라 단순히 숫자만 비교할 수는 없다.
국가에 곡식을 바치거나 공을 세워 면천하는 길도 있었다. 1801년에는 왕실과 중앙 관청 소속의 납공노비 6만 6,067명이 해방됐다. 그러나 사노비와 일부 공노비는 계속 남았다. 돈을 모아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었다는 사실과, 모든 노비에게 그 기회가 있었다는 말은 구분해야 한다.
7. 장시·보부상·객주·여각은 오늘날 무엇과 닮았을까?
장시는 정해진 날에 열리는 시장이었다. 19세기 초의 『만기요람』에는 전국 1,061개의 장시가 기록돼 있다. 많은 장시가 닷새마다 열렸고, 장날을 달리하는 여러 시장을 상인들이 이어 다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기시장>
오늘날의 오일장과 기능이 이어지는 시장이며, 농민이 생산물을 팔고 생활용품을 마련하는 거래 공간이었다.

| 거래 상품 | 생산·판매한 사람 | 유통 방식 |
|---|---|---|
| 쌀·보리·콩·채소 | 농민과 곡물 상인 | 생산자가 직접 팔거나 상인이 사들여 다른 지역에 판매 |
| 베·모시·무명 | 생산 농가·직조업자·포목 상인 | 가내 생산품을 장시와 행상을 통해 판매 |
| 옹기·농기구·목기 | 수공업자와 행상 | 직접 판매하거나 상인이 받아 여러 장터에 유통 |
| 소금·어물 | 염업자·어민·선박 상인 | 해안의 생산물을 배와 육로로 내륙에 운반 |
| 담배·지역 특산물 | 재배 농민과 상인 | 생산지에서 사들여 수요가 있는 시장에 판매 |
곡식과 옷감, 소금과 어물 같은 생활물자가 생산자와 상인의 손을 거쳐 거래됐다.
거래에는 상평통보 같은 동전이 쓰였고, 물물교환도 있었다. 상품이 이동하는 과정에는 다음 사람들이 있었다.
보부상: 물건을 운반하며 파는 이동판매상
보부상은 물건을 직접 운반하며 여러 장터에서 파는 행상이었다. 보상은 옷감 등 상대적으로 가볍고 값이 나가는 물건을 봇짐에 싸서 다녔다. 부상은 소금·옹기·철물 같은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녔다.
오늘날에 빗대면 이동판매상이나 장터를 순회하는 소규모 유통업자에 가깝다. 운반뿐 아니라 판매까지 맡는 역할이었다.
객주: 판매를 맡아 주선하는 거래 중개업자
객주는 객지에서 온 상인의 거래를 주선하는 사업자였다. 상품을 맡아 구매자를 연결하고 위탁판매를 하며 수수료를 받았다. 상품 보관과 숙박, 운송 주선과 자금 대여를 겸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도매 중개상·위탁판매업자·물류업자가 맡는 기능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가령 먼 곳에서 곡식을 가져온 상인이 객주에게 맡기면, 객주는 거래 상대를 찾아 판매를 주선하고 대금을 정산하는 역할을 했다. 수수료를 얻는 대신 지역의 거래 정보와 거래처를 제공한 것이다.
여각: 큰 물량과 상인의 숙박을 함께 맡는 사업자
여각도 상품 거래를 중개하고 상인에게 숙박을 제공했다. 통상 곡물·소금·어물처럼 부피와 무게가 큰 상품을 다루며, 큰 창고와 우마를 수용하는 마방 등 시설을 갖춘 경우가 있었다.
오늘날의 물류창고·도매 중개·상인 숙박시설이 결합한 사업에 빗댈 수 있다.
객주와 여각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명칭과 업무가 겹쳤다. 둘을 엄격히 나뉜 업종으로 보기보다, 상품과 상인에게 필요한 여러 기능을 함께 제공한 사업자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전주 같은 감영 소재지와 강경 같은 포구는 상품 유통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해안의 소금과 어물이 내륙 장터로 들어오고, 농촌의 곡식과 옷감이 도시로 나가는 길 위에 장시와 상인들이 있었다.
8. 바다를 건너는 꿈과 논 한 마지기의 꿈
1823년을 전후한 조선에는 땅을 사는 평민도, 땅을 팔고 품팔이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다. 자기 재산으로 해방을 구하는 노비가 있는 한편, 생계를 위해 가족을 노비로 파는 사람도 있었다.
포야이스행 이주민과 조선 사람의 처지는 서로 달랐다. 그래도 두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 토지가 생활의 기반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자기 땅을 갖는 일에는 추수 뒤 자기 몫을 더 남기고, 가족의 다음 해를 준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바다를 건너 새 땅을 찾는 사람에게도, 장터에서 번 돈으로 논밭을 사려는 사람에게도 땅은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과 연결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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